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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가 경험했던 국내 중소기업의 한계

by redkaos 2022. 11. 21.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학과 교수님의 소개로 평소에 들어본 적도 없는, 그래서 용도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제진대 회사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전공이 컴퓨터 공학이었기 때문에 개발팀에서 진행 중이었던 탁상형 및 공압식 액티브 제진대의 개발, 진동 측정, 진동 측정 프로그램 개발 등의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액티브 제진대를 개발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일본의 액티브 제진대 대리점 역할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어 회화가 조금 가능하다는 이유로 영업부의 업무였던 액티브 제진대의 셋업 지원 또한 어느새 나의 주 업무 중 하나가 되었으며, 시도 때도 없이 일본의 기술자와 함께 출장을 다니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셋업 지원이지만 일본어 통역사와 다를 것 없는 역할을 하면서 한 대당 3~4시간씩 걸리는 공압식 액티브 제진대의 셋업 및 진동 측정을 했었다.

 입사 당시, 해외 업체의 제품을 분석하며 개발하고 있었던 탁상형 액티브 제진대는 가속도 센서의 재현이 지지부진한 상태로 품질이나 성능 등을 따라잡기 힘들었으나 다른 회사의 액티브 제진대에서 사용하고 있는 속도 센서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였으며, 동시에 구조가 좀 더 단순한 VCM을 액추에이터로 채용하면서 탁상형 액티브 제진대의 개발은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다.

 공압식 액티브 제진대 또한 해외 업체의 제품을 기반으로 동일한 센서와 액추에이터 등을 채택하여 개발을 진행하였으나 센서 앰프나 고무마운트의 품질 문제, 스테이지 피드포워드를 위한 스테이지 선정 오류 등으로 인해 개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며, 개발부 직원들이 하나둘씩 회사를 떠나면서 결국에는 나도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한국의 중소기업에서 조금이라도 개발을 했던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공감할 것이다. 영업부는 실적이 좋으면 좋다고 회식을 하고, 안 좋으면 더 잘하라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회식을 한다. 국책과제 연구비의 일부는 영업부나 다른 부서 직원의 급여로 지급되며, 과제에 참여하고 있는 개발부 직원에게 성과급으로 지급되는 일은 거의 없다. 액티브 제진대의 속도 센서를 찾아내고, VCM과 함께 적용하여 탁상형 액티브 제진대 개발이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보였을 때, 성과를 축하하는 회식 자리에는 영업부 직원들이 몇 명 동행하였고, 회사 대표로부터 받은 것은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한창 개발 중이던 공압식 액티브 제진대의 고무마운트가 비틀어지고, 찌그러져서 제대로 된 성능 실험을 위해 교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돌아온 것은 그럴 필요 없다는 반응이었다. 제대로 된 지원만 있었다면 공압식 액티브 제진대의 개발도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었을 텐데 회사의 도움도 없고, 개발 인원도 없는 상황이라서 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개발은 많은 노력과 비용이 소모되며, 목표에 부합하는 결과물을 완성하려면 시간도 필요하다. 특히 액티브 제진대는 센서나 액추에이터와 같은 다수의 핵심 부품을 수입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자본이 필요하며, 제어 알고리즘의 개발도 쉽지 않은 편이다. 따라서 비용이나 시간에 대한 투자와 더불어 개발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없다면 고하중 장비용 액티브 제진대의 개발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담이지만, 예전에 한 제진대 업체에서 액티브 제진대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던 프리랜서 개발자로부터 기술 자문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 액티브 제진대 업체에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다니던 회사의 대표님께 양해를 구하였는데, 공압식 액티브 제진대는 취급하지 않았던 탓인지 허락이 떨어져서 요청을 수락한 후에 일을 진행했다. 그 업체는 중고로 나온 일본의 공압식 액티브 제진대를 구매하여 개발을 하고 있었는데, 1년 정도 자료 조사를 진행하다가 본격적으로 개발에 들어가면서 블로그에 올려둔 액티브 제진대에 대한 글을 보고 나에게 연락을 하게 되었다고 했었다. 처음에는 약 9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일을 하려고 했었는데, 프리랜서 개발자와 몇 번 만나면서 일을 진행하다 보니 아무래도 '기술 자문'이 아니라 보조 개발자가 필요한 것 같아서 결국에는 두 달 만에 일을 포기하고, 마무리하게 되었다. 일을 포기하게 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액티브 제진대를 개발하겠다면서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구매한 액티브 제진대의 본체를 지방에 있는 공장에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제일 컸던 것 같다. 정말로 공압식 액티브 제진대를 개발하고 싶었다면 '기술 자문'을 요청할게 아니라, 공압식 액티브 제진대의 제어 알고리즘을 구하고 싶다거나, 공압식 액티브 제진대를 개발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으면 차라리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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